로제 카이와는 산업문명은 루두스의 특수형태, 즉 즐거움을 얻기 위해 시작되고 지속되는 무상의 이차적인 활동인 취미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보다도 기계적이고 세분화된 연속작업에 의해 초래된 인격의 훼손을 보상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일을 가리키며 흔히 이는 무엇인가를 다시 만드는 것으로 행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일종의 자신을 속박시킨 객체에 대한 복수라고 칭한다. 이는 존 버거가 말한 취미와는 다른 접근 방법이라 주목하게 되었다. 존 버거는 일반적 문화라 함은 거기에 비춰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적어도 자신의 모습 중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부분을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문화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훨씬 적게 가지게 되는 셈이며 그들의 경험 중 많은 부분 - 특히 감정적이거나 내재적인 경험들 - 은 그들 자신에게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고 한다. 결국 그들의 주된 자기표현 방식은 행위를 통한 것이다. 이것이 영국 사람들이 '직접 해보기(DIY)'취미에 그렇게 많이 매달리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즉, 존 버거에게 취미 다시 말해서 놀이란(아주 세부적인 예이지만) 문화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행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차이가 있어 보이는 두 관점도 공통점이 있다. 결국 놀이가 지속된 형태인 취미란 것은 각 개인을 위한 보상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의 지나친 합리주의 관점이다. 보상이라는 것은 놀이가 예술로 발전하여 인간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데에 필요한 창조적 영감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놀이를 닮아서 자신을 하나의 예술적 존재로 나아가게 해야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존재미학의 정신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창작을 위한 광기, 예술을 이끄는 우연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문명과 역사의 사회로 도입이 미미크리와 일링크스의 조합을 알레아와 아곤의 규범으로 대체했을 때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이와 같은 현상 연구의 가치를 피력하고 있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이 두 조합으로 인한 지나친 종교화, 권력화이지만 이것이 문화 또는 예술로 발전했을 때, 그것은 하이데거가 언급한 그리스인들이 신전을 통해 오히려 신을 창조했다는 표현같이 미미크리와 일링크스의 긍정적인 힘은 없었던 것을 있게 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 및 문화의 진리인 것이다. 삶을 예술 및 문화로 발전시키고 자기의 육체와 영혼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창조성은 작가가 말하는 문명화 이전 시대의 주술사의 행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말했듯이 오늘날 이 미미크리와 일링크스의 조합은 놀이와 허구의 한정된 규칙에 갇히게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정신착란 또는 망상이라고 표현한 이 행위를 탈근대적인 관점에서 광기와 우연이 일으키는 강렬한 삶의 에너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일까? 또는 자연과의 미메시스를 통해 산업화로 무분별하게 파괴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발전시킬 모델은 아닐까? 인간은 광기와 우연이 이끄는 에너지와 자연과의 미미크리 또는 미메시스를 통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처럼 꾸며 나가게 되고 이는 이것이 산업화로 파괴된 사회에 미적 가치를 부여해주는 대안은 아닌가라는 자문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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