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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Tech Box 2020. 7. 10.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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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나 예술에서나 살인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관심거리가 되었고 그 강도와 다양성에 있어서 감성적으로 와 닿는 코드가 무던해지는 요즘이다. 예전에 유영철이 기존 사회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에서 연쇄 살인을 저질렀으며 소설 향수에서의 그르누이 역시 기존 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 속에서 그 자신이 추구하는 최고의 향기를 체취하기 위해서 25명의 소녀들을 살해한다. 이와는 반대로 소설 죄와 벌에서 보이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스스로 옳다는 명제에 준하여 고리대금업자인 늙은 노파를 죽인다. 위에서 보여지는 살인들은 그 행위 측면에서 동일성을 보이지만 그 정당성에는 어떠한 차등한 가치를 부여해야 되는 것일까? 또한 그에 따른 형벌은 어떻게 가해져야 하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대학생이다. 그는 인간을 비범인과 평범인으로 구분한다. 즉 비범인은 인류의 생활에 무한히 공존할 수 있는 발전을 했을 때, 방해자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다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비범인은 나폴레옹 같이 사람을 죽여도 죄의식이 없이 사람들에게서 인정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가난한 사람을 등쳐 먹는 스스로 ‘이’ 한 마리라 칭하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고 실수로 그녀의 동생까지 죽이게 된다. 살해 후, 극심한 혼란에 빠진 그는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실제로는 죄의식과 그의 명제의 속에서 갈등하다가 가난한 매춘부 소냐를 만난다. 그녀의 순결한 영혼에 감화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수하고 7년간의 시베리아 유배 생활을 하게된다.

우선 여기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왜 살인이라는 행위를 하게 되었을까? 살인 직전의 그는 악마적이며 초인적인 개인주의에 관철되어 스스로 세운 명제에 도취되어 있었다. 노파가 가난한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이’와 같은 존재라고 하지만 그 스스로의 명제는 자아도취일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그의 범죄의 완벽성을 위해 노파의 동생까지 살해하는 대목에서 그가 자금적인 이익에 그 행위의 강렬한 의지를 찾았을 것이다. 즉 이왕 살인하는 것이면 타인의 생활뿐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 시너지까지 같이 추구한 이기주의의 발로로 밖에 설명이 안된다.

그럼 살해 후, 라스콜리니코프의 의식은 어떻했을까? 과연 그의 정당성 아래 일말의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을까? 자수하기 전까지 그는 ‘이’ 한 마리 죽였노라고 하지만 엄청난 죄의식에 갇혀 있었다. 훔친 돈을 바윗돌 아래에 숨기는 행위와 가족이 보내준 돈을 두 번 밖의 만나지 않은 알코올 중독자의 장례식 비용으로 준 점은 그 자신이 재물에 눈이 멀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란 점을 애써 증명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인다. 즉 무관심이 오히려 관심으로 비춰진다는 말이 있듯이 재물에 대한 무관심은 그의 죄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형상화해준다. 또한 당시 그가 보인 열병, 혼돈의 흔적은 일반적으로 견딜 수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범죄자의 모습이다.

이 후, 라스콜리니코프는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대표되는 소냐에게 감화되어 자수를 하여 시베리아로 7년간 유배를 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형벌의 시작으로 비춰지겠지만 외적인 상태와 달리 라스콜리니코프 내면에서는 양심이라는 이름을 억누르던 형벌의 끝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소설에서는 진정한 벌을 외적인 무거움이 아닌 내적인 양심의 무거움을 주는 것이 가장 힘겹다고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이라는 시대에서 바라보는 극단의 죄를 지었지만 주변 사람의 용서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행위에 죄의식을 갖지 않았다면 그 전처럼 혼돈 속에서 두려움에 계속 몸서리쳤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력하게 꿰뚫고 있는 살인, 즉 행위의 정당성에 있어서 라스콜리니코프의 행위는 처음 시작점에서 그 오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범인이니 평범인이니 이러한 분류로 나누는 명제는 간단하고 명확하게 보인다. 하지만 히틀러와 같은 이가 지금에 와서 시대를 초월한 영웅으로 평가 받고 있을까? 아니다. 자신에게 갇혀 그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자가당착적이고 오류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완벽하다고 믿어지던 명제가 결국은 제2의 히틀러 같은 사람을 낳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살인은 그 어떠한 명제로 정당화 하기에는 많은 위험 요소가 있으므로 정당한 살인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 형벌에 있어서 외적인 제재가 죄의식을 일으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법의 처벌이 죄의식보다 공공의 복리라고 말한다면 지금까지의 논지가 무상하고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사회는 공동체 구성원의 화합이 목적이기에 무조건적인 제재가 과연 이상적일까 하는 회의가 든다. 그렇게 볼 때, 지금의 우리가 안고 있는 사형 제도와 안락사 문제, 평화라는 정당성으로 이루어진 이라크 파병은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기에는 위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의문을 남겨 석연치 않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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